영성과NLP신경논리수준
그리고..
12가지 통찰을 통한 영성차원의 원리이해
로버트 딜츠는 신경논리 수준을 통해 “인간차원”을 구분했다.
영성, 정체성, 가치/신념, 능력, 행동, 환경차원이 존재한다.
어떠한 차원에서 사느냐에 따라 인간 삶의 모양과 패턴이 달라진다.
정체성차원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그 역할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미션을 발견하게 된다.
가치, 신념차원에서는, 왜 나는 그 일을 하려고 하는가?
능력차원에서는, 내가 미션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어떤 능력을 가져야 하는가?
어떤 패턴과 사고 외형적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가?
행동 차원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환경 차원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사회적 환경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이 처럼 어떠한 차원에서 인생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모양과 방향이 틀려진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가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우리는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다.
“~ 무엇이다.” 라는 I AM에 관한 진술은“완전한 체험”을 낳는다.
그것은 자극과 반응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선택적 의식공간”을 활용하는
인생이다. 즉 영향력의 원에서 말하듯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사는 상태이다. 나는 그냥 “나
로써 존재함”으로 행복하고, 삶이 축제가 되는 것이다. 즉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 자체가
참 나를 선언하는 길이다. 이것은 합일의 체험을 낳으며, 자연의 이치와 하나가 되는
“자연체”가 된다.
결과물이란, 단지 매순간“내가 누구인가를 선언”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부산물 일 뿐이다.
하위레벨에 있는 신념/가치, 능력, 행동, 환경차원은 반응화 된 인생이다.
무엇이 있고 없냐에 따라.. 대상의 차이와 비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반응화 된 인생을 산 것이다. 즉 관심의 원에서 말하듯 외부와 상대의 반응에 신경 쓰는
인생을 사는 상태이다. 정체성차원은 그냥 모든 희로애락의 수행과정이 행복과 축복인데,
이와는 다르게 하위레벨 차원에서는 늘 무엇이 필요하고,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고, 충족되면 행복해지는 상대적인 관점이 존재한다.
“~을 원한다”와 “필요하다는” 진술은 그것에 상반되는 부족의 심리와
분리의 환상을 낳는다.
이것을 “인간의 마음에 의한 에고”라 하여 “인간심”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하위레벨 차원들이 결코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나쁘고 좋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좁은 선택과 넓은 선택만이 존재할 뿐!
그 인생 또한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 이고,
더 높은 차원으로 가기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가장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차원은
정체성 차원에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하고, 영성 차원에 비전을 갖는 것이다.
비전이 생길 때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찾게 된다.
정체성 차원에서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개인차원이고, 둘째는 타인차원이다.
개인차원의 정체성은 하위레벨의 반응화 된 인생으로 살 가능성이 높고,
타인차원의 정체성은 상위레벨의 영성차원과 연결되어,
작은 나를 뛰어넘어 큰 나를 실현하는 자아실현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신경논리수준에서는 영성차원을 정보-에너지 수준이라고 이야기 한다.
정보-에너지란, 양자차원에서 아주 미세한 파동에너지, 아원자 입자세계에
소통의 관계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단계이다.
이 세계를 깨달았다는 것은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일체감의 감각이 회복된 상태이다.
당연히 영성차원이 “방향”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N L P의 신경논리수준은 인간차원의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꽃과 같다. 신경논리수준에 영성차원을 이해한다는 것은 N L P를 바라보는
높은 차원의 눈을 뜨게 하는 꼭 필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N L P의 꽃을 피우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 이번에 할 이야기는 12가지 통찰을 통해 영성차원의 개념적 이해와 원리들을
설명할까한다.
[Direct by 힐링참만남 코치 이득우, 참고-딜츠 "신경논리수준"]
차원에 따른 일어나는 감각 상태 정리.
신경논리수준 차원 |
수준에 따라 일어나는 감각 상태 |
영 성 차원 |
‣ 자기 정체성을 넘어 본질과의 일체감 느낌. ‣ 옳고 그름 없는 완전한 사랑, 평화, 믿음. ‣ 있는 그대로 맑고 청정하고, 거울과 같은 “자연체”의 상태. |
정체성 차원 |
‣ 나는 자신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야! 나는 가난한 사람이야! 잘못된 자기 정의를 내리므로, 건강을 해친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 이다. 정체성을 발견하면 분명한 자기 확신에 대한 감각! 긍정적인 자아상을 회복한다.
‣ 영성차원으로 연결 : 전체차원의 참“미션발견” [참 도를 가는 삶!] ➜ 상위레벨 플러그인
‣ 개인차원으로 연결 : 개인차원의 미션발견 [에고를 위한 삶!] ➜ 하위레벨 플러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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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신념 차원 |
‣ 믿음과 가치에 의해 상대적으로 맞고, 틀림을 분별해 배척하는 배타적 생각에 빠짐. 예) 종교의 극구단체 - 옴진리교, 나치(히틀러) 나만이 옳다는 믿음, 생각. |
능력 차원 |
‣ 능력이 나보다 잘 났거나, 못난 대상을 만나면, 우월감에 빠지거나 피해의식을 갖게 된다. ‣ 실력이 좋은 사람을 우상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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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차원 |
‣ 자신이나 상대가 한 행동에 대해서 죄의식, 부정적 감정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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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차원 |
‣ 환경적 요소가 좋고 나쁜 조건에 의해 언제든 마음의 동요가 반응화 되어있다. 예) 집 크고-작고, 차가 좋고-안 좋고. 인간관계 좋고-안 좋고 (남의 반응에 항상 신경 씀.)
|
우리는 이 표처럼 정체성 하위레벨 차원에서는 “반응화 즉 앵커링” 된 삶을 살아간다.
나는 누구인가?를 깨달음으로써 진정한 미션을 발견하고, 영성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한 방향으로 정렬된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우린 알게 된다.
삶은 축제 였다는 것을~
첫 번째 통찰
미션의 발견! 그것은 “깨달음”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하여.. 어떠한 역할을 통해 나눌 수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미션 즉 사명이 만들어지게 된다. 미션을 발견했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자각하는 상태”이다. 자각 된 에너지인 사명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삶을 산다면, 미션의 대한 분명한 비전이 있다는 것이다.
비전은 방향성이다. 나는 누구이며 자신의 역할을 발견했다면, 나아가고자하는 방향성이
있어야한다. 방향성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참된 영성을 자각할 수 있다.
영적인 스승들은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 말처럼 이라면, 어떠한 역할과 나눔 방향성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잘못해석하면 그냥 “지금 이 순간” 즐기며, 아무 걱정 없이 세상이 어떻게 되든 방관자적으로 인생을 살면 되는 것이 아니냐? 나만 편하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냐? 생각할 수 있다.
나 자신도 이러한 고민을 밤잠 못자며 했던 기억이 있다.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겠다. 우리는 3차원의 몸을 가지고 있다.
3차원의 몸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환경차원의 사람과의 관계, 행동차원의 선택의 탁월성,
능력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은 몸을 유지하기 위한 삶이다.
그리고 우리는 4차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4차원의 떠오르는 마음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능력차원의 전략과, 가치와 신념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 또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삶이다.
중요한 것은 3차원 4차원을 초월한 높은 차원의 삶이다.
차원이 높아질수록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체계”임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영혼을 만나게 되면, 우리가 어떠한 존재가 되겠다고
선언하면, 바로 이루어지는 상태가 된다.
그것은 뇌의 3층구조가 신피질(사고,이성,판단), 구피질(기억,감정), 뇌간(생명중추)
이 통합되는 상태이다. 외면과 내면의 완전한 일치가 일어난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가 될 때,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물질세계에서 창조하는 가치와 신념,
능력, 행동, 환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통찰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내 생각대로 창조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당연히 과거와 현재 미래로 보는 우리의 시각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래서 영적 세상은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본성은 “분별없는 완전한 사랑”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오직 사랑을 하기 위해서” 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신의 차원이 높은가 뿐이다.
두 번째 통찰
미션을 발견한 것은 자신의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그릇의 모양과 크기와 자신의 색깔에 맞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모두가 자라 온 방식과 환경이 틀리 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에게 강요받지 않는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한 길을 가신 대표적인 분이 테레사 수녀님이다.
테레사 수녀님은 수녀가 되어 평생을 헐벗은 이들은 보살피고, 헌신한 것은
단 한번에 사건을 통해서였다. 어느 날 한 흑인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는데, 흑인은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된다. 결국 테레사 수녀님이
계신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때 테레사 수녀님은 깨달음을 얻고
자신보다 불쌍하고 헐벗은 이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 헌신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 흑인에 아픔과 자신의 아픔이 틀리지 않음을..
그와 나는 하나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전에 그녀는 몸을 위한 환경적, 행동적, 능력적, 신념적인 분별적 삶음 살았다면,
그 차원을 넘어 더 높은 영성 차원의 하나의 감각을 회복함으로써, 나는 누구인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고, 그 역할을 통해 ~무엇을 도울지 분명히 자각 한 것이다.
자신만의 미션을 발견하고, 나만의 색깔과 향기로
아무도(我無道) 가지 않는 나만의 길을 가라!
즉 아무도(我無道)란 “내가 없는 길”이다.
나를 작은 몸에 규정짓지 않고, 전체가 “나”임을 자각하는 단계!
내가 했다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이다.
이럴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헌신과 봉사가 가능하게 된다.
세 번째 통찰
나와 너는 하나이기 때문에...
사실 “세상에는 나 밖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상황과 사건 만나는 모든 사람, 친구, 선생님, 부모님, 희로애락 심지어
질병과 사고까지도 모두 내가 선택 하고 창조 한 것이다.
(이 이야기에 대한 부연 설명을 듣고 싶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실인가?
양자역학과 뇌 의식의 출현 1,2편을 읽어보면 잘 이해가 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밖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적인 삶은 오로지 용서와 사랑 밖에 없다.
비판, 비난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대상을 본다.
나는 원래 없슴(無)이다.
내가 없으니, 거울처럼 비추어지는 대로 모든 대상이 내가 된다.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며, 나의 고통은 그의 고통이다.
나와 너는 하나이기 때문에...
네 번째 통찰
선과 악의 개념은 무엇인가?
이 세상이 진실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우리의 마음속에서 창조되었다면,
어찌하여 이렇게 자명한 옳고 그름 즉 선악이 존재한단 말인가?
우리는 선과 악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믿음이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본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경험하는 선과 악을 창조했다.
우리가 사과를 먹는다. 사과를 먹는 우리는 사과를 먹음으로써 건강해지니 그건 선이다.
하지만 사과입장에서는 그건 악이다. 이토히로부미는 을사조약을 토해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았다. 당연히 우리에게는 악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국장까지 지낼 정도로 나라의
영웅이다.
무엇이 선악에 기준을 만들까? 그것은 바로 “입장차이”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어디 소속인가? 나와 어떤 상호적 이익 관계를 맺고 있는가?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가? 그가 가진 신념과 가치는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이
너와 나를 나누는 기준이 되며, 그것이 선과 악의 잣대가 된다.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기준삼아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라고 자문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해라! 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우리는 나에게 욕하고, 때리고 나의 재산을 빼앗아 간 이러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것은 우리의 자신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랑과 가치기준은 환경-행동-능력-신념 차원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화 되어있다. 어제는 적 이였지만, 오늘은 나의 이익관계와 맞으면 아군이 된다.
그것은 낮은 차원의 반응화 된 관계와 사랑이다.
그것은 비교 판단에 의해 언제든지 기준이 바뀐다.
이 처럼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세상 적 모순을 발견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도 사랑해라!는 말씀은 영성차원의 높은 사랑을 의미한다.
영적인 사랑은 가치 판단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모든 걸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
이 차원에서는 선과 악의 기준은 무의미하다.
이 차원에서는 일체성, 전체와 하나로 연결된 감각을 회복한다.
이 차원을 경험하는 최고의 방법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I AM에 관한 분명한 진술이다.
우리는 ~을 원한다. 또는 무엇 무엇을 주세요! 기도한다. 하지만, 그것은 "원하지 않은"
이라는 부족의 경험을 체험하게 만든다.
나는 ~ 이다라는 분명한 자각 곧 깨달음은 일체성의 체험, 온전함에 대한 체험을 낳는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말씀 처럼 “매사의 감사해야한다.”
감사는 일체감의 체험을 가져다 주는 가장 빠른 도구임으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로 살아가야 될지에 대한
분명한 역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참 도(道)를 깨친 상태이며, 누구와
비교되지 않는 onLY이 되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 너와 내가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하나임으로 그 누구와 비교되지 않는 즉 나는 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정체성 차원은 나 다운 삶! 나를 위한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전체를 위한 삶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과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의 존재 하는
환상이다. 왜 그렇다면, 우리는 선악이라는 상대적인 체험을 창조한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상대계로 들어오기로
선택한 것이다.
즉 영혼의 여행을 위해서이다.
다섯 번째 통찰
영성을 개발하는 열쇠!
마음이 “거울상태” 되는 것!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도무지 제 마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에게 벽에 걸려있는 수건을 재처보라고 이야기 한다.
제자는 의야 해 하며, 수건을 치웠는데 그 벽에는 거울이 있었고,
그 거울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스승이 이야기 한다. “모든 비춰지는 대상이 나라는 거울”인데 어찌하여 너는
세상이 시끄럽다 이야기 하는 것이냐?”
그렇다. 거울은 사물을 비추었다가도 다른 곳으로 그 방향을 돌리면, 잔상을 남기지 않고 다시 그 사물을 비춘다. 우리의 마음 또한 이러해야 한데, 우리는 수없이 많은 집착과 욕심, 성냄, 걱정들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청정하지 못한 마음은 무의식속의 각인되어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재생되어 끈임 없이 자신을 괴롭힌다.
기억무게 = 이미지 x 마음 노폐물 (집착과 욕심, 성냄, 걱정)
- 위빠사나 개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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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연히 상(이미지)이 보인다.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높은 차원에 있는 사람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상(이미지)에 어떠한 마음의 노폐물로 곱하거나, 더하여 기억의 무게를 만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작은 흙 알갱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이 흙 알갱이에 “마음 노폐물”
이라는 물을 섞으면 더 많은 작은 알갱이가 찰흙처럼 덩어리가 되어 즉 “기억무게”
가 되는 것이다. 기억무게는 무의식으로 끈임 없이 반복되며 우리의 행동, 사고 패턴을
지배한다.
신경과학적으로, 오감을 통해 들어온 정보는 전기펄스를 만들어 내고, 신경원과 신경원의 연접을 통해 관련된 정보들은 네트워크 되며, 기억의 흔적의 만든다.
오감의 정보는 낮은 전기펄스(뇌파가 알파파나 시타파, 델타파)에서는 세포의 충격을
주지 않기 때문에 D N A에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높은 전기펄스(뇌파가 감마파, 베타파)
에서는 세포의 충격을 주어 D N A에 각인된 정보의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아까 이야기한 찰흙 덩어리와 같은 “기억무게”인 무의식의 정보이다.
마음이 청정한 거울상태가 되는 것!
삶의 행복을 가져다는 그리고 영성에 문을 여는 열쇠이다.
여섯 번째 통찰
모든 건 각자 차원에서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모든 건 각자 차원에서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 곳에서 만난다.
그 한곳 그곳이 영성차원에서 “하나로 연결된 상태”를 뜻한다.
그렇다면, 결국 한곳에서 만날 것 인데 무엇 하러 수많은 종교와 철학, 사상, 이념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것은 본질이란 무無의 상태에서 하나, 셋, 다섯 계속 갈라지며,
다양한 측면이 비추어진 그림자이다.
홀로그램 우주에서 말하는 홀로그래픽과 같다.
다양한 측면들은 인간의 놀이를 위해 신이 준 선물이다.
우리는 그 다양한 놀이에 즐길 수도 있고, 안 즐길 수도 있다.
신은 우리에게 그 놀이에 대한 선택의 권한을 모두 주셨다.
우리는 그 놀이에서 주인공일 수도 방관자일 수도
그 놀이를 도와주는 도움이 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역할을 하는 동안 충분히 깊게 그 대상과의 희로애락을 느껴야 한다.
충분히 모든 희로애락를 느껴 본 사람은 더 이상 그 놀이를 하고 싶지 않게 된다.
주관화 되었던 놀이에서 객관화된 나를 느끼고 싶어 한다.
그는 놀이에서 벗어나 놀이를 지켜보는 자(관찰자)가 되기로 하고,
그래서 그 놀이를 모두 내려놓는다.
인간 본성은 모두 영혼의 의식인 “관찰자”가 되고,
자신이 왔던 영(無)점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길이 존재하는 건,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그릇에 모양과 크기가 틀리 기 때문이다.
옛 말에 “꼴값” 한다는 말이 있다.
각자 자신에 심신의 형태와 모양에는 값어치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환경, 행동패턴, 능력, 믿음 나의 성격..
모든 것이 자신 스스로가 본질로 돌아가는
“하나의 숙제”를 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자신의 색깔에 맞는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면 그만 인 것이다.
당신이 추구하는 길이 종교라면, 그 길을 걸어라!
당신이 추구하는 길이 철학과 사상이라면, 그 길을 걸어라!
당신이 추구하는 길이 어떤 체제와 시스템이라면, 그 길을 걸어라!
어떠한 길로 틀리지 않고, 잘못되지 않았다.
예수님 말씀하시길 단지 덜 익고 들 익고의 차이 일 뿐
100미터로 가든, 1000미터로 가든 결국 우리 모두는 만날 것이며,
선을 향해 본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선악의 잣대가 아니라, 선택의 폭을 넓히는 유연함이다.
선악의 잣대는 늘 에고인 몸과 마음차원의 놀이에 나를 머물게 한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 넓어질 수록 우리의 영혼의 의식을 확장된다.
결국 모든 건, “완전한 받아들임”을 통한 영혼의 성장이다.
우리는 전체의 나와 한 번도 분리되어 본적 없는 “깨달은 존재”이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이 세상과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는 이유는
환경, 행동, 능력, 믿음차원의 나를, 본질의 나와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나”라고 말할 수 없다. 역으로 내가 아닌 것이 없다.
우리 모두는 본질로 가는 여행을 하고 있다.
일곱 번째 통찰
현재 “지금 이 순간(here and now)”에 깨어 있어라!
어느 깨달은 스승과 제자가 있었다. 제자는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어떠한 상태가 되는 겁니까?
다시 말해, 깨달음 뒤에 깨달음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스승은 이야기 했다. “밥 잘 먹고, 똥 잘 싸고, 잠 잘 자는 게
깨달음”이다. 제자는 반문했다. “누구나 밥 먹고, 똥 싸고,
잠을 잡니다. 그것이 어찌 깨달음입니까?” 듣고 있던 스승은 다시
이야기했다. “아니다!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지 않고,
똥 쌀 때 똥 싸지 않으며, 잠 잘 때 잠만 자지 않는다.”
즉 현재를 살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를 산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오쇼라즈니쉬에 말처럼 “많은 사람들은 집에
있지 않아 집에는 거지와 다른 행인이 가득하다” 라고 이야기한다.
늘 자신의 행위에 많은 생각에 취해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이리저리 분산된 상태를 이야기한다.
즉 결과 중시의 삶의 패턴에 빠져, 생각이 과거나 미래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는 매순간 순간을 자각하는 과정 중시의 삶이 되어야 한다.
에너지가 모이기 위해서는 한 방향으로 정렬된 상태가 되어야 한다.
한 방향으로 정렬된 인생이란, 자신에 대한 분명한 자각, 가치관, 능력,
행동, 환경 모든 것의 에너지가 모인 상태이다.
그럼으로 인해 우린 현재에 대한 에너지를 낭비 하지 않을 수 있다.
현재에 머문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자각을 통해,
객체와 주체를 구분하지 않는 “영성적 차원의 에너지와 하나 된 상태”를 통해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헌이고, 봉사이며, 원칙이고,
양심이자, 위대함이라고 부른다.
우린 늘 현재에 “지금 이 순간(here and now)”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림출처-최면심리상담협회"스칼렛"]
여덟 번째 통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성인들 말씀에 깨달을게 없는 것이 깨달음 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우린 이미 깨달음에 존재이기 때문에 깨달음께 없는 것이고,
우린 한 번도 이 전체의 나와 떨어져 본적이 없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전체의 하나인 나 와 분리되어 있다고 믿음은,
개인의 에고 적 환상과 개체가 분리 되어있다는 집단무의식에서
생겨 난 것이다.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역으로 표현하면,
우린 이미 완전하며, 이미 깨달음 그 자체이고, 사랑 그 자체이다.
한 번도 분리 되어보지 않은 나는 이미 위대함이다.
전체와 공(空)에 대한 다른 표현이 사랑이며, 위대함이다.
아홉 번째 통찰
우린 한 번도 분리되어 본적 없는 “하나”이다.
우리가 깨달음 자체가 아니라면 우린 존재할 수 없다.
즉 깨달음은 일체감에 대한 명확한 자각 상태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인 존재 상태임으로, 우리가 할 일은
이 하나된 위대한 체험을 사랑과 헌신, 봉사 라는 도구를 통해
나누는 일이다.
물고기가 물에서 태어났듯, 파도가 바닷물에 한 표현이듯,
얼음이 물에 응고점이듯, 돌이 바위에 일부이듯
우리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이다.
우리에 개개인 또한 하나(본질oneness)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열 번째 통찰
본질(하나됨oneness)로써 기준을 삼아라!
모든 건,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본질(oneness)을 벗어나 하는 많은 일들은 혼돈 속에 많은
시간과 수 생(生)에 시간이 필요 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건과 관점은 본질의 기준삼아 보아야 한다.
어느 선승과 제자가 태극기 옆을 지나가다 스승께 이야기한다.
"스승님! 바람에 태극기가 흔들립니다." 스승은 이야기한다.
잘 보아라! 태극기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우린 본질을 기준삼아 삶을 꾸려가라는
선인의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화를 내고 인상 쓰고 있을 때,
본질과 분리된 상태를 체험한다.
그 상태에는 뇌파가 증가하고, 그로인해 잡념이 많이 생긴다.
즉 에너지가 분산되고, 한 방향(본질에 대한 영적기준)으로 써야 될
에너지가 낭비되어 전체를 보는 눈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영혼의 여행에 시간이 걸리게 된다.
난 이 본질(onenss)에 기준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원칙,비전,양심" 이라고 부른다.
열한 번째 통찰
본성 이야기 하나
본질이란? 무(無) 없슴이며,
본성이란? “참 나의 성품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 참 나가 무엇인가라고 언어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나란 원래 없슴(無)”이기 때문이다.
공(無)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다는 톨레의 말 처럼
“도道를 도道라하면 도道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말 처럼
본질을 무엇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 그것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본질을 이야기 할 때, 은유법을 써서 말씀하시곤 했다.
본질 이야기 - 하나, 큰 바위는 우리의 본성입니다.
큰 바위가 쪼개지면서, 수없이 많은 작은 돌멩이가 생겼습니다.
그 개체는 우리들에 "분리된 나 - 에고"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돌멩이가 자신이 큰 바위 였음을 기억하며,
그것과 하나가 될 때, 도(道)를 깨닫게 됩니다.
본질 이야기 - 둘, 파도 또한 우리의 본성입니다.
바다에 파도가 출렁입니다.
파도에 물 입자 하나는 우리들의 "분리된 나 - 에고"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물 입자는 자신이 원래는 바다 였음을 기억하며,
그것과 하나가 될 때, 도(道)를 깨닫게 됩니다.
본질 이야기 - 셋, 물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물이 날씨가 추우면 얼음이 됩니다.
물이 고체가 된 얼음은 우리들의 "분리된 나-에고"입니다.
하지만, 얼음이 원래는 물이 였음을 기억하며,
그것과 하나가 될 때, 도(道)를 깨닫게 됩니다.
본질 이야기 - 넷, 바다는 우리의 본성입니다.
바다에 물고기가 헤엄을 칩니다.
바다에 물고기는 우리들의 "분리된 나-에고"입니다.
하지만, 물고기가 원래는 바다 속에서 태어났음을 기억하며,
그것과 하나가 될 때, 도(道)를 깨닫게 됩니다.
본성이야기 둘 (본질을 깨닫는 좋은 이야기)
바다를 헤엄치는 해녀는 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물에 잘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몸에 납을 차고 바닷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조개와 해산물을 땁니다.
일반사람들은 물에 대한 두려움이 커 물에 들어가면 허우적거리다
몸이 무거워져, 물에 빠져 죽고 맙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려 구 발버둥 치면,
물속을 빠져나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해녀처럼 모든 것을 바다에 맡기고,
있는 그대로 물과 하나가 될 때 자유롭게 물속을 헤엄치고,
평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이와 같아 두려워하고, 집착하면,
결국에는 물에 빠져 죽고 말지만,
본질에 모든 걸 내맡기고,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면, 참 평화를 느낍니다.
열두번 번째 통찰
영적위치(Spiritual position)를 회복해라!
우리는 영적성장에 눈떠야 한다.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차 타고 다니고, 권력을 갖고 이것이 성공이지만,
영적차원에서의 성공은 "오로지 성장" 이다.
자신만에 영적위치(Spiritual position)속에 있어야 한다.
영적위치(Spiritual position)란,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감각"속에 머물고 있는 것을 뜻한다.
당신이 걱정하고 힘들어 하는 일들을 하늘 위, 지구 밖 아니 우주 밖으로 가서
그 상황들을 바라보아라! 느낌이 어떤가?
죽도록 힘들었던 감정들이 별것 아니게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의 의식과 관점은 끝없이 확장되고 성장 되어야 한다.
커지고 커지다 보면, 모든 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주위에 존재하는
나무, 태양, 음식, 그리고 지금 당신과 교감할 수 있도록 컴퓨터를 만든 사람,
만나는 모든 사람이 있기에 내가 존재 했슴을 깨닫게 된다.
나는 무(無)에서 뻗어 나와 다차원의 형태로 형상화된 존재이지만,
그 형태는 전체의 모습에 한 표현인 것이다.
누군가 당신을 힘들게 하는가?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에게 죄책감을 심는가?
그에게 고맙다고 이야기 해라!
그에게 감사하다고 이야기 해라!
"감사의 기도"는 하나에 대한 감각을 찾아 주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가 나의 스승 이란 걸 알아야 한다.
거울에 비추어진 그는 나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와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을 통해 나는 매순간 성장하고 있다.
고정화된 무의식적 관념에 빠져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인생을
보내기에 우리에게 3차원적 몸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우리는 "하나의 대한 감각(oneness)"을 회복해야 한다.
참된 본성에 대한 시..
난 오래 전 참 자아에 대한 시를 쓰면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황홀경을 느꼈다.
그것은 참! 신비한 체험이었다.
가장 진실하고, 가장 나다운 내가 된 듯 했고,
어떤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완전한 나로 돌아 가는 듯 했다.
참 자 아
그. 와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그. 와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그. 와 함께 있으면, 미소는 환희에 젖어있고,
눈빛은 황홀감에 불타고 있으며,
몸과 마음은 쇠처럼 단단하고 꽃처럼 유연합니다.
그. 는 사랑 입니다.
그. 는 평화 입니다.
그. 는 믿음 입니다.
그. 는 늘 변하지 않는 평상심 입니다.
그. 는 스스로 홀로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 입니다.
그. 는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그 무엇 입니다.
그. 는 모든 생명의 가슴에 존재하며, 道, 神, 公 이라 불립니다.
수없이 그는... 늘 우리와 함께 있으며 우리의 모든 모습을 사랑합니다.
그는... 참자아 입니다.
그, 와 함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맑음과 간절한 정성” 뿐입니다.
그, 와 함께 있으려면, “작은나”라는 모든 걸 포기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땐 끈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있는 “작은 나”는 영원하지 않은 일시적인 걸
깨달게 됩니다.
그, 와 함께 있는 건, 빈둥거리며,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글쓴이 - 힐링 참만남 코치 이득우
우리가 찾아야 될 사명이며, 비전이자, 경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란 그것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실체는, “오직 사랑과 평화와 믿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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